[한겨레 2003.10.15] 통증 참지 말지어다 고질병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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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증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통증 전문가들은 ‘대상포진 후 신경통’ 환자들의 경우 아이를 낳거나 손발을 잘라낼 때 보다 훨씬 더 아프다고 호소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대상포진은 수두바이러스가 척수신경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나타나 피부발진을 일으키며 신경을 파괴하는 질환으로 통증이 매우 심하고, 치료 뒤에도 종종 극심한 신경통을 후유증으로 남기는 게 특징이다.
교직을 정년퇴직한 박아무개(67·남)씨는 대상포진 후 신경통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박씨는 지난 3월 등쪽에 띠 모양으로 물집이 잡히는 발진이 생기면서 심한 통증이 나타나 2주동안 입원해 피부과 치료를 받고 발진은 낳았으나 발진이 났던 부위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씨는 “칼로 도려내는 듯하다” “불에 타는 듯하다”고 통증을 호소했다. 또 “피부에 닿기만 해도 기절할 정도로 통증이 생겨 셔츠를 아예 벗고 지낸다” “통증으로 많은 밤을 울면서 뜬 눈으로 지낸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처럼 극심한 통증을 안은 채 3개월여동안 여러 병원을 돌아다닌 끝에 통증 전문 의료진을 만나 3개월간 적절한 치료를 받고 현재 약물치료로 통증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증상이 호전됐다.
통증 전문가들은 “박씨의 경우 대상포진 발병 초기부터 바이러스 치료 뿐만 아니라 통증 조절 치료를 함께 받았다면 끔찍한 통증이 3개월간 지속되는 상황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며 “통증은 그 자체가 병이기 때문에 조기에 치료하면 할수록 좋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잘 참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살고 있어 심하게 아픈데도 약도 안먹고 끙끙 앓으면서도 참고만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럴 경우 통증 자체가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만성통증이란 고질병을 부른다는 것이다. 만성적인 두통이나 요통 등 각종 통증을 방치할 경우 척수나 뇌의 중추신경계에 손상을 입혀 ‘신경병증성 통증’ 같은 난치성 만성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씨의 사례에서 보이는 대상포진 후 신경통을 비롯해 얼굴 부위의 감각신경에 문제가 생긴 3차 신경통, 사고로 잘려나가거나 수술로 잘라낸 수족이 마치 있는 것으로 착각해 통증을 느끼는 환지통 등이 치료하기 어려운 신경병증성 만성통증에 속한다.
최근의 통증 연구에 따르면 통증은 면역기능을 약화시키므로 만성통증 환자는 감기 등 각종 질환에 쉽게 걸릴 수 있고,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암 환자의 수명까지 단축시킨다고 한다. 또 통증의 만성화는 불안증, 불면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까지 유발한다고 한다.
통증의 조기치료는 ‘통증의 악순환’을 회피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게 통증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체에서 발생한 통증 신호는 척수(등골)을 통해 위로 올라가 뇌의 시상핵을 거쳐 피질에 도착해 아프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통증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통증 신호가 척수로 들어오면 척수에서는 척수반사라는 길을 통해 통증 신호를 발생시킨 부위의 운동신경과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근육과 혈관을 수축시키므로 결국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피가 잘 통하지 않고 노폐물은 축적되어 자연치유력이 감소해 통증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게 통증의 악순환이다.
뜨거운 물에 데었을 때 “앗 뜨거워”하면서 화들짝 놀라며 순식간에 피하는 동작을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통증은 기본적으로 몸의 이상을 알려주는 경보기이기도 하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신체 안팎의 환경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통증의 크기는 통증을 일으키는 자극의 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자극의 세기가 같더라도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느끼는 통증의 수위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만성화된 통증은 통증을 유발하는 자극이 없는데도 통증이 저절로 생기고, 통증을 유발할 수 없는 가벼운 자극에도 통증을 일으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중 총상을 받거나, 운동경기중 흥분상태에서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통증신호가 아무리 강력해도 뇌가 통증신호를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뇌는 통증신호를 받아들여 통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대로 통증을 억제하는 신호를 내보내 통증을 완화하거나 못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과학기술원 신희섭 박사팀은 이달 초 티(T)-타입 칼슘채널이라는 유전자의 통증조절 기능을 밝혀낸 연구 성과를 <사이언스>에 실어 눈길을 끌었다. 수면 또는 치매와 같은 뇌질환에서 의식차단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유전자가 뇌에서 감각신호를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을 하는 시상핵에서 통증조절 역할을 수행하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이다.
신 박사팀은 시상핵에서 티-타입 채널을 제거한 변이 생쥐에서는 통증신호가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되어 더욱 심한 통증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통증을 느끼는 뇌의 작용을 분자생물학적 수준에서 밝혀낸 것으로, 티-타입 채널을 활성화할 경우 통증을 완화할 수도 있음을 보여줘 새로운 개념의 진통제 개발 가능성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도움말=가톨릭의대 강남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문동언 교수,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이상철 교수, 최윤근 통증클리닉 원장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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